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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 김난주 번역, 현대문학
재미있다.
작년 언젠가 술자리에서 선배가 재미있다면서 추천해 준 소설이다.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날 당장 사보려고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절판이었다. 중고책으로는 사서 보기 싫어서 그냥 잊었다.
최근 한참을 한가하게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일이 몰아쳤던 적이 있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가볍게 읽을 소설을 찾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이번에는 나와 있길래 샀다. 책상 위에 꽤 오래 올려져 있다가 일없는 주말 동안 다 읽었다. 이렇게 단숨에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게 나에게는 흔치 않은 일인데, 딱히 푹 빠질 정도의 매력 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으니, 그냥 양이 적어서 그랬나 보다.
소설책 대부분에는 본체에 붙어있는 표지 말고 분리되는 종이 표지가 있다. 책을 더 예쁘게 꾸미는 방법인 것 같은데, 이게 성가시다. 유명한 책은 그 밖에 띠 같은 표지가 하나 더 있다. 책을 펼쳤을 때 옆으로 삐져나오는 게 신경 쓰이고 책 본체와 분리되어 덜렁거리는 게 싫어서 아예 빼고 본다. 근데 이게 또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다 보면 다시 끼워 놓고 보관하게 된다. 사람의 심리가 참 희한해.
전반적인 내용은; 사고로 최근의 80분간 만 기억할 수 있는 수학 박사와 그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그리고 그의 아들이 주인공이고, 수학 박사를 데리고 사는 수학 박사의 형님의 부인이 조연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수학 박사는 어린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들 사이에는 야구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수학 박사는 듣고 접하는 숫자 혹은 공식과 연관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준다. 그걸 가정부와 가정부의 아들'루트'가 들으며 서로 정을 쌓고, 사고를 치고, 야구 이야기를 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다가 그런 즐거움이 점점 일상이 되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가만히 보다가 보면 별거 아닌 내용이기도 하고, 수학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유치하기도 하지만, 재미는 있다. 어렸을 때 수학 공부를 더 많이 해두었다면 내용에서 언급한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틸컷과 예고편도 찾아봤는데, 엄청 착한 영화 같다. 책을 읽을 때는 영화도 보고 싶다는 의욕이 있었지만, 예고편을 보는 순간 별로 보고 싶지 않아졌다. 소설 초반에 주요 인물들이 묘사될 때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그림이 그 영화의 인물들과 조금 달랐다. 일본 소설임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도 왜 그런지 머릿속에서 그리는 인물은 다 서양인이었다. 아니. 아랍인? 인도인? 혹은 흑인? 뭐 그런 이미지가 컸다. 주인공이 가정부라서 가정부가 주인공이었던 영화를 떠올린 것 같기도 하고, 똘똘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토토라던가 니콜라라던가, 아니면 파이 정도? 그리고 누군지 기억 안 나는 중동 아시아계 어린아이가 아른거리는데. 그래서 일본사람이 하나도 안 떠올랐던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책이 번역본이라 한국어인 데다가 일본 지명이나 일본인 이름이 거의 안 나온다. 이건 그냥 무국적 소설이라 봐도 좋겠다.
이런 소설을 본지 오래라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죽죽 읽었다. 그러다 후반부에 가서 드디어 소설의 감성에 적응했는지 피식 대기도 하고 장면 묘사에 감탄하기도 했다. 전공서적도 보면서 접어두지는 않는데, 독후감을 쓰게 되면 옮겨 적으려고 세 군데 접어두었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그때 당시의 감흥이 없네. 그냥 그렇다.
그 중에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있다."는 문구인데, 평소에 자주 하는 생각이라 반가웠다. 누군가 나를 별거 아닌 걸로 호들갑 떨면서 칭찬을 하거나 치켜세울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것 "박사는 책을 덮어 책상에 올려놓고 루트 곁으로 다가온다. 메모지가 사락사락 소리를 낸다. 박사는 한 손을 식탁에 올려 놓고 다른 한 손은 루트의 어깨에 올려놓는다. 둘의 그림자가 겹친다. 의자 밑에서 루트의 발이 흔들거린다. 나는 오븐에 반죽을 넣는다." 이런 상황 묘사인데, 그 나른하고 한가한 분위기가 떠올라 좋았다. 이런 표현을 보면 소설가는 대단하다. 그렇다는 걸 직접 글을 써보면 안다. 나로서는 쉽지 않은 표현이다. 그림으로 그려내는 건 글보다는 조금 더 쉬울 수 있겠다. 근데 그것도 여전히 어렵긴 하다. 표현이란 게 노력하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다. 감정 표현 못 하는 박사가 숫자만은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걸 보면, 역시 깊이깊이 빠져야 한다. 확 빠져서 전문가가 되면 그에 관한 건 뭐든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봐야 박사가 하는 모든 표현도 다 작가가 쓴 거긴 하지만...뭔소리여... 그냥 끝.
간만에 머리가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아 그런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그런 게 있었나?
루트에게 정답게 다가와 노트 내용을 함께 봐주는 나른한 장면을 그렸건만,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살해하려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이 됐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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