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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원미동은 부천의 중심에 있는 법정동이다. 서점에서 서성대다가 이 책을 잡은 것이 바로 이 원미동이라는 까만 제목이 눈에 띠였기 때문이었다.
내 집도 부천이다. 난 27년 부천 토박이다. 토박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 동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야 도시와 관련한 전공자이면서 공간이나 장소라는 말을 많이 좋아하고 숱하게 사용하는 사람이니, 내가 사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었고(교과서에 실릴만큼) 그 글을 쓴 양귀자라는 작가는(시를 짓는 분이다.) 더더욱 인정을 받고 계신 분이었단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내가 아는 동네에 대해서 그것도 격동의 80년대 이야기를 써놓았다니 안 읽어볼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연작소설집이다. 작가는 원미동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을 여러편 연재했었다. 그 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래서 읽기가 참 쉽다. 게다가 단편을 모았음에도 등장인물과 공간의 설정은 모두 같다. 주인공으로 부각되는‘주연’격의 사람들이 있고, 나머지 원미동 주민들은 ‘조연’이다. 그렇게 돌아가며 주연과 조연역할을 한다. 무대는 당연히 원미동 국자처럼 생긴 골목안의 바로 그 동네이다.
내가 들고 있는 원미동 사람들은 3판 발행본인데 이 책의 1판은 87년에 발행되었단다. 87년 발행이라면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과 같다. 실제 이 책이 나왔을 때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정말 원미동 사람들, 그들의 현재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지 20년이 지났다. 20년이면. 참 많이 변했겠지. 지금 내가 사는 동네와 비교를 안해볼 수가 없다.
총 열한가지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그 동네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11가지 에피소드인가. 아니면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11가지 삶의 유형인가.
시작은.. 서울을 떠나 부천으로 이사 오는 가족의 이야기이다.
착찹함과 새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사. 서울 셋방을 포기하고(사실은 구할 수가 없어서) 부천에서 집을 샀다. 서울에서 쫓겨나는 듯한 더러운 기분에 알지도 못하는 공장천지의 부천으로 진입한다. 강추위 속에서 결국 힘들게 원미동에서 앞으로 등장할 여러 동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짐을 풀며 첫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캐릭터 하나하나, 그들의 행동, 사람들의 말투, 모든 것에서 그들의 힘들고 안타까운 삶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희극이 아니다. 해피 엔딩이 되지 않는다. 즐겁게 잘 나가다가도 끄트머리에선 애매모호한 말로 내내 즐거웠던 삶을 힘들것이 확실한 내일을 기다리는 삶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마도 확신 없는 행복한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웃고 있어도 편하지 않고, 돈을 벌어도 걱정이 되는 서민의 삶을, 오늘 즐거웠다고 내일도 즐거울 수 없는 삶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삶이 행복하다는 확신을 내릴 수 없기에 글도 희망적으로 쓰기 싫었을 것이다.
서울로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죽어도 판매직은 안할 것이라 버티다가 결국 요상한 물건의 판매사원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아저씨,
개발의 압박 속에서도 원미동 한 복판에서 밭을 일구는 자식 농사 망친 할아버지 ,
정신나간, 혹은 그런 척 하는 자칭 시인의 청년과, 그를 바라보는 몇 살짜리 꼬맹이 소녀 ,
첫 이야기에 등장한 새로 이사 온 집의 부부와 그 집을 수리하러온 검증되지 않은 기능공의 심리전 ,
남편이 감옥에 있는 여자와 그 딸, 남편과 이혼한 여자와 그 아들의 대공원 소풍 ,
속세를 버리고 홀현히 원미산으로 떠나버린 전설의 은둔자 ,
사진관 아져씨와 왕년에 잘나가던 원미동 찻집 마담과의 마음아픈 3류 사랑이야기 ,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슈퍼마켓 청년과 쌀집 아저씨의 상권다툼 ,
똥도 제대로 못 싸는 지하셋방 공돌이 청년과 공장 사람들의 파업 ,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 자신과 노래잘하는 그녀의 친구
나는 문학을 잘 모른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작가의 문체가 어떻고, 이야기 구성이 어떻고 하는 다분하게 문학적인 부분이 아니다. 게다가 허구와 온갖 은유, 의인법을 사용해서 멋들어지게 꾸며대는, 철학적인 문체들에는 흥미없다. 이 책은 그냥 말해준다.(물론 내가 모르는 작가만의 멋진 문체와 구성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무렇지 않게 같이 그 시대를 살면서 보아왔을 사건과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좋다. 그 이야기에 빠진채로 지금과 비교하면서 즐겁고 아쉽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게 구분된다.
87년과 07년은 생긴 것이 너무 다르다. 양귀자가 말하는 공간, 아니 말해준 그 시대의 공간과 지금의 원미동은 어찌보면 딱 20년 만큼 변했나보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식상한 말이 있듯. 그게 당연한 것이다.
부천의 원미동이라는 도시의 모습이 완전하게 변했다. 공장들은 떠났고 더 이상 원미동 영감처럼 오기로 짓는 텃밭은 존재할 수가 없다. 원미동 사람들 근처에 있던 하얀색 부천시청은 이미 원미구청으로 다운 그레이드 당했고, 그것도 그나마 부천에서 가장 초라한 구청건물이 되어버렸다. 연립들이 있던 자리는 조금 더 세련돼졌고, 더 이상 노는 건물은 없다. 지하에서 살면서 똥 못 싸는 경우도 없고, 슈퍼마켓끼리의 경쟁은 대형 마트들에 의해 무의미해졌다.
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민이라는 캐릭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같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마음, 열심히 밀고 들어가는 만원전철, 먹고살기, 애키우기, 소박하게 욕심부리고 경쟁하는 모습들..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로 가는 출근 열차는 엄청나다. 그때처럼 푸쉬맨도 있다. 서울에서 퇴근하는 1호선 인천행 열차도 마찬가지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부천은 여전하다. 서울의 위성도시이고 베드타운이라는 명예? 그 중 변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에 에어컨이 나온다는 것 하나쯤..
변한게 없다.
지금 또 다시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이젠 80년대의 이 이야기처럼 흐뭇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글렀다고 본다. 어떤 에피소드가 나올만한 동네의 사건이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 동네라는 것은 없다. 동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동네는 나 하나가 아니다. 이웃과 이웃과 또 이웃의 범위. 내 옆집사람과 인사하고 술 한 잔 하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경계, 그것이 바로 내 동네라 생각하지만. 역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읽으면서 가장 좋아했던 소설속 소품이 있었는데 원미동 길가에 마련해 놓은 평상이다. 이 평상은 거창한 의미로 지금 시대에 말하는 “커뮤니티 공간”이라 하겠다. 지금은 관에서 억지로 만들어도 잘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공터 하나만 있다면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평상하나만 있다면 사람들이 모였던 것처럼 스스로 대화의 의욕이 있었다.
변했나 안변했나. 변한 듯 안변한 듯 애매모호하다. 겉으로 보이는 차림세나 도시의 구조, 멋드러진 건물들은 모두 변했지만,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그대로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변했다.
시대의 전반적인 변화는 당연하게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개인생활이 대세라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지금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난 “우리 동네”를 꿈꾼다. 살면서 막연하게 생각해온. 그런 커뮤니티의 삶, 진짜 이웃사촌과 함께하는 삶의 동네를 살고 싶고, 또 만들고 싶다.
80년대의 원미동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살았나보다. 힘들어 죽겠고, 불안하면서, 평범한 원미동 사람들의 모습이 왜 나는 괜히 부럽고 웃음이 지어지며 행복하게만 보여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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